제시문
기존의 역사가들이 민주주의, 노예제와 같은 정치·사회제도의 모델을 찾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주목했다면, 최근에는 성(性)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서양 고대사를 다루는 경향도 있다. 그중 일부 학자는 혐오스러운 아동 학대라고 할 수 있는 소년애에 대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가 비교적 관용의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스어 파이데라스티아는 파이스(pais, 소년)와 에란(eran, 사랑하다)의 합성어로 소년애를 뜻한다. 소년애 관계에서 사랑의 대상인 자유민 소년은 에로메노스로 불리며, 이들의 나이는 17세 이하였다. 소년의 연인은 에라스테스로 불리며, 흔히 18~30세 사이의 남성이 이 역할을 수행했다. 고전기 아테네 사람들은 소년을 육체적 아름다움의 추구 대상이자 동시에 지적 대화의 동반자라고 생각했다. 플라톤도 "소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 소년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理性)을 갖기 시작한 나이의 소년들만을 사랑한다."라고 서술한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육체적 쾌락이 양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파이데라스티아는 육체적 탐미와 사회적 교육, 우정의 조합이라 간주되었다. 아테네의 노예제와 동성애를 연구한 골든이 주장하듯이,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의 육체적 관계도 소년의 명예와 존엄을 배려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에로메노스의 역할이 30세까지 지속되었다. 크세노폰은 남성과 소년이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남성이 명백히 소년의 육체에 매혹되었다면, 이는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플루타르코스도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 사이의 관계는 교육적이며, 정신적 사랑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보았다. 현대의 역사가 카틀리지는 소년애가 지녔던 정치적 엘리트 충원 역할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세력 있는 집안 출신인 소년의 에라스테스가 된다는 것은 소년의 가장 가깝고 믿을 만한 조언자, 동료가 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물론 이런 해석들은 파이데라스티아의 본질인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로마 공화정 후기인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까지 동성애를 원하는 자유민 남성들에게 '준비된 손쉬운 사랑'의 대상은 주로 노예였다. 호라티우스의 시구에 등장하는 "난 준비된 손쉬운 사랑을 좋아하거든"이라는 표현은 상류층의 노예주가 노예 남녀를 성욕 충족의 도구로 삼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음을 보여 준다. 이 경우 노예주들은 종종 미소년을 찾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러한 소년 노예는 델리카투스라 불렸다. 하지만 기원전 6~5세기의 아테네와 달리 기원전 2세기의 로마는 성인 남성과 자유민 소년과의 관계를 처벌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로마사가 폴 벤느는 로마인이 시민의 능동성과 남성성에 대해 결벽적이었기 때문에 장차 시민이 될 소년과의 관계를 거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미셸 푸코는 소년애를 억제한 결과 신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젊은 노예들과의 동성애가 로마에서 널리 행해졌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제정 초기인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까지 로마에는 그리스의 생활 방식을 숭상하는 헬레니즘이 번져 있었다. 그 일환으로 소년애가 로마에 흘러든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대의 지식인 키케로가 "이 우정의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이 습속은 그리스인들의 김나시움에서 생겨난 듯하다."라고 논평했듯이, 로마의 지식인들은 젊은 남성들이 연무장에서 벗은 몸으로 운동하는 것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로마사 연구자 윌리엄스는 로마인이 그리스인에게 소년애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로마의 소년애는 그 뿌리가 그리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풍토에 이식된 문화는 원산지에서와는 다르게 생장하는 법이다. 로마의 소년애도 그랬다. 구애의 절차와 관계의 목표 모두 그리스에서와는 달리 명예로운 편이 아니었다. 소년들을 육체적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충족이 소년애의 궁극적 목표였으며, 이는 잠재적 시민의 명예에 대한 배려와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