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선출된 정치인이 합법적으로 민주적 가치를 잠식하는 민주주의 퇴행도 급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의 쿠데타 못지않게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집권자는 '조작'을 감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조작이란 명백한 위법행위가 아니라, 선거권이나 피선거권 규정의 개정이나 미디어 규제를 통한 여론 개입, 국가기구에 대한 당파적 영향력 증대 등과 같이 불법성이 명확하지 않지만 정치 과정을 불공정하게 만들어 집권 가능성을 높이려는 행위들을 일컫는다. 집권자의 조작과 유권자의 대응이 결합하여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것을 설명하는 두 가지 모델을 살펴보자.
우선, ㉠++스볼릭 모델++에서 유권자는 후보자의 정책이념과 자신의 정책이념 사이의 거리와 반비례하는 효용의 크기에 따라 지지 후보를 선택하는데, 후보자 가운데 집권자를 판단할 때는 그가 행한 조작의 정도에 비례하여 생기는 효용의 감소를 계산에 넣는다. 다시 말해 유권자는 민주주의 가치에 대해서도 내재적으로 선호한다고 가정된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 우파 집권자가 조작을 행한 경우, 온건 우파 유권자는 민주주의 훼손에서 생기는 효용의 감소가 좌파 도전자의 집권으로 생기는 이념 관련 효용의 감소보다 커서 집권자를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극단적인 우파 유권자는 좌파 도전자의 집권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고 민주주의 훼손을 감수하고라도 집권자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한편 자신의 재집권을 위해 조작을 행한 집권자는 조작으로 득표가 늘어나는 대신 조작에 따른 민주주의 훼손으로 인해 득표가 감소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때 득표 감소는 주로 중도 혹은 중도우파 유권자 집단에서 발생한다. 결국 집권자는 득실을 비교하여 선거에서 가장 많이 득표할 수준에서 조작의 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한편, ㉡++루오와 쉐보르스키 모델++에서 유권자들은 후보자의 정책이나 능력 등을 보고 주관적으로 평가한 '매력'에 기초해서 투표한다. 이처럼 시민들이 민주주의 자체에 내재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라도, 더 매력적인 정치인들에게 통치받고 싶어 할 것이므로 시민들은 누구에게 통치받을지를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중시한다. 이는 그 사회의 민주주의 역량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선거에 당면하여 유권자들은 현재 선택되는 후보자의 매력, 즉 선거로 들어설 정부의 질로부터 얻는 효용과 미래의 민주주의 역량, 즉 시민들이 미래에 더 나은 도전자가 등장할 때 언제든지 선거로 집권당을 교체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얻는 효용 사이의 트레이드오프에 직면한다.
더욱 매력적인 도전자가 등장하면 시민들은 집권자의 교체를 원할 것이기 때문에 권위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은 집권기에 조작을 택하고, 그 결과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유지할 가능성, 즉 집권자 프리미엄이 커지게 된다. 프리미엄이 0인 상태에서 시작하여 지도자와 유권자 사이에 게임이 반복되는 상황을 상정한 이 모델에 따르면, 잠재적 도전자가 가질 매력의 기댓값에 비해 집권자의 매력이 매우 높거나 매우 낮은 경우에 민주주의가 위협받게 된다.
집권자의 매력이 높아서 시민들이 집권자에 매우 만족하고 도전자가 더 매력적일 가능성이 작을 때, 집권자는 조작에 거리낌을 갖지 않는데 이를 '지지 속의 퇴행'이라 한다. 반면 집권자의 매력이 낮은 경우에는 집권자가 운 좋게 몇 차례 선거에 승리해서 집권자 프리미엄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집권의 장기화를 우려하는 시민들은 설사 당면 선거에서 도전자의 매력이 더 낮더라도 정권교체를 원하게 된다. 이를 예상하는 집권자가 프리미엄을 더욱 높이고자 가능한 모든 조작을 취하는 것을 '반대 속의 퇴행'이라 한다. 두 가지 퇴행에서 모두 쿠데타나 민중봉기와 같은 수단에 의해 교체될 위험을 감수할 정도까지 권위주의 성향의 집권자는 퇴행으로 치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