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1518년 6월 중종은 "내가 정사를 돌보면서부터 태평한 통치를 바라여 널리 인재를 구한 지 열 해 남짓이나 효과 없이 한탄만 할 뿐이니, 많은 현능한 이들이 추천되어 어진 교화를 도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의논하라." 하고 명하였다. 조선은 시험으로 재목을 선발하여 관리로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고려로부터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유학적 소양을 선발 기준으로 하는 과거는 성리학을 표방한 국가에 매우 적합한 제도였다. 학업을 바탕으로 한 등용 방식은 학문 발전과 사회 교육에도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시험만을 위한 경전 암기와 모범 답안 위주의 학습이 진정한 학문은 아니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런 공부로는 또 다른 소양이라 할 품행과 덕성을 키우지 못한다고도 하였다. 중종의 하교는 이러한 인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조광조가 주도하는 사림 세력은 기존의 과거가 글재주만 시험할 뿐 관료로서의 재능이나 인품, 행실 등은 보지 못한다고 하면서, 진정한 교화를 실현하기 위한 보완으로서 과거제도에 천거제인 현량과를 도입하기를 청하였다. 덧붙여 현행 제도는 권세가의 자녀가 합격하기에 유리하여 초야에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하였다. 과거제도는 실력 위주의 인재 등용 방식이었고, 노비가 아니라면 백성은 누구든지 응시할 수 있는, 형식적으로는 평등하고 공정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과거 응시를 위한 학업에 경제적 뒷받침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과거의 최종 합격은 벼슬할 자격만 주어지는 것이라서, 급제한 뒤에 실직을 받아 관료로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의 후원과 인맥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시험은 지배계층의 지위를 유지하는 기능도 갖게 된 것이다.
과거는 매우 힘든 시험이기도 했다. 그 꽃이라 할 수 있는 문과는 경전의 암기와 해석뿐 아니라 작문과 논술의 능력까지 평가한다는 점에서도 어렵지만, 시험 과정도 굽이굽이 고갯길이다. 우선 경전 이해 중심의 생원시와 글 짓는 능력을 보는 진사시도 초시와 복시를 거쳐야 한다. 원칙적으로 생원이나 진사라야 문과에 응시할 수 있다. 문과에서도 경전, 작문, 논술로 초시 3단계, 복시 3단계를 거쳐 최종 33명이 뽑힌다. 이들이 다시 치르는 전시는 품계를 내리기 위해 등수를 정하는 논술 필기고사로서 임금이 주관한다. 성적에 따라 정7품, 정8품, 정9품을 받고, 장원은 종6품이다. 이렇게 열리는 출세의 길 때문에, 소수의 정원만 뽑히는 험난한 시험에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 경쟁이 치열했다. 등급 때문에 다시 과거를 보기도 했다. 그런데 현량과는 덕망과 행실로 각처에서 천거된 이들로 한 번의 논술 시험을 치러 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인 것이다. 게다가 급제자들에게는 일반 과거보다도 높은 품계를 주려 하였다.
이런 천거제에 대하여 훈구 세력의 반발은 컸다. 시험 없이 쉽게 관리가 되는 것은 공정성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추천으로 선발하는 것이 오히려 부당한 특혜로 작용한다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519년 현량과가 시행되었다. 천거된 이들을 선별하여 근정전에서 논술로 시험하였고, 12명의 관직 보유자가 포함된 28명의 문과 합격자가 나왔다. 다수가 서울 지역 거주자였다. 장원은 조광조와 친분이 두터운 김식이었고, 사림파의 후원자로 알려진 안당은 세 아들이 모두 합격하였다. 자파 세력 키우기라는 정적들의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훈구파를 견제하는 데 사림을 이용하려 했던 중종도 지나친 당파 형성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현량과는 결국 기묘사화의 주요한 계기와 명분으로도 작용하였고, 사화 직후 현량과의 문과 합격은 취소되었다. 이후 현량과는 다시 시행되지 않았으며 과거제도 자체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