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대한제국기 지식인은 대체로 군민공치(君民共治) 체제를 주장했다. 이들은 유교를 기반으로 서구 학문을 받아들였기에 급격한 체제 변화를 경계했다. 입헌군주국인 일본을 통해 헌정질서에 대한 서구 지식을 수용한 점, 전제군주국에서 군주제 부정이 정치적 반역이라는 점도 있었으나,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기에는 일반 국민의 정치적 능력이 불완전하다는 인식도 컸기 때문이다.
황제와 관료들의 무능과 변절로 국권을 잃어가는 상황이 이어지자 일반 국민의 각성과 능력 배양을 통해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면서 국민주권론이 등장했다. 1909년 이상설의 신한민보 논설은 이런 인식 변화를 잘 드러낸다. 유교적 세계관을 지닌 관료 출신 이상설은 유럽을 순방하며 파악한 서구 정치체제를 소개했다. 임금을 위해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임금을 둔 것이며, 임금은 인민의 사무를 위한 공복일 뿐이니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 상전인 인민의 책망을 면할 수 없다. 또 주권이 있는 나라라야 임금이 있을 수 있는데도 우리 인민은 나라가 망해도 임금에게 복종하는 것만 생각하고 주권이 없어져도 임금이 있다고 믿는다. 인민의 이런 인식 때문에 임금만 굴복시키면 인민은 자연 복종할 것으로 일제가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설은 군주제 부정을 주장하지는 않았는데, 그에게는 입헌군주제가 유일한 선택지였다.
대한제국 정부의 기능이 마비되어가자 국권 회복을 위해 망명정부 수립이 유력한 방법으로 대두되었다. 국내외 국민을 결집하기 쉽고 외국의 도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13도의군의 도총재 유인석은 이상설과 함께 1910년 7월 고종에게 연해주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영도해 줄 것을 청했다. 유인석은 임금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고 서양의 입헌정치에는 반대했다. 평등과 자유에 의한 무질서보다 신분의 차별을 인정하는 질서가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독립운동진영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동양에서 중·일전쟁과 독·일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신한혁명당++은 국내외를 연결한 독립전쟁을 위해 군비를 정비하면서 중국과 군사원조동맹을 체결하려고 했는데, 이 조약의 국제 보증을 독일에서 구하려 했다. 그런데 독일이 제국이고 중국에서도 위안스카이가 세력을 확장할 것이 예상되므로 독립전쟁에서 두 나라의 지지를 얻으려면 제정(帝政)을 표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신한혁명당은 고종을 당수이자 미래 정부의 원수로 추대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여 오히려 일본이 승전국이 되었고, 신한혁명당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신한혁명당이 독립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군주제를 지지했다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아직 군주제와 공화정이 선택 가능한 제도로 논의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일어난 신해혁명은 만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혁명인 동시에 군주정체를 전복하는 혁명이었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이 '반일 및 공화 혁명'이라는 이중 혁명을 지향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국내 독립운동단체에서는 1915년 여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가 공화제를 지향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 및 친일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이들은 국내외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후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기다렸다가 일시에 혁명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대한광복회가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공화의 독립국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은 체포된 회원의 재판기록에 나타나는데, 이들은 광복회의 목적이 국권 회복과 공화정 수립에 있다는 것, 나라에 왕이 없으므로 민국을 세운 것이라 진술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도 국민주권론을 기초로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제 정부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날은 곧 우리가 주권을 계승한 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다음과 같이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에 공화제를 명시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