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정치 제도는 대개 다양한 정치 세력 간 타협의 산물인 경우가 많지만, 그 제도의 설계자는 제도를 통해 구현하려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 대부분 제도들은 상충관계에 있는 가치들을 가지고 구성되므로 가치를 최적화하려는 설계자의 ㉠ ++고민++은 증폭된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들 중 대표성과 책임성, 그리고 권력 분립과 정책 효과성 등은 어느 하나 포기하기 쉽지 않은 중요 가치들이다. 문제는 이들을 동시에 모두 만족시키기 힘들다는 것이다. 의원내각제라 불리는 의회제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력이 융합되는 체제로서, 효과적 정책 추진에는 유리하지만 권력의 견제에는 취약하다. 대통령제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국민이 따로 선출하여 권력을 분립하는 것이 기초가 되는 체제로서, 상호 견제는 용이하지만 충돌하면 교착에 빠지기 쉽다. 설계자는 권력의 집중과 분산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을 추구한다.
의회 선거 제도도 권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수제는 단독 과반 의석 확보가 쉬워 책임 소재가 비교적 분명해진다. 유권자는 선거를 통해 집권 세력을 문책하기 쉽지만, 다양한 사회 집단의 정치적 선호가 의석 분포에 비례적으로 반영되기는 어렵다. 반대로 비례제는 다양한 정치적 선호가 의회에 폭넓게 반영될 가능성은 커지지만, 연립정부가 되는 경우가 잦아 책임 소재가 분산되기 쉽다. 이런 제도들을 기계적으로 절충할 경우, 제도 각각이 추구하는 가치 간의 상충은 불가피하다.
제도를 결합할 때 설계에 따라 ㉡ ++상충관계의 유형++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가치가 달성되는 만큼 다른 가치가 희생될 수도 있고, 가치들의 희생이 훨씬 줄어들 수도 있으며, 가치들의 희생만 부각될 수도 있다. 혼합선거제도는 개별 지역구에서 다수 득표자가 의석을 차지하는 다수제와,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 배분이 결정되는 비례제의 장점을 결합하려는 제도적 시도이다. ㉢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불리는 독일의 선거 제도는 혼합형 선거 제도의 성공적 사례로 거론된다. 지역구 주민-대표자의 연대감 유지, 다수 정당의 책임성 등과 같은 다수제의 이점을 적당하게 살리면서도, 동시에 비례제의 대표성과 포괄성의 이점을 과도하게 희생하지 않았다. 지역구 당선과 비례대표 의석 배분을 독립시키지 않고 연동시켜 정당 득표율과 의석률을 일치시킨 점, 그리고 지역구 의석과 비례대표 의석의 비율을 대등하게 유지한 점 등이 대체로 긍정적인 요인으로 지적된다. 반면, 제도 간 절충 때문에 오히려 각각 추구되던 가치들이 과도하게 희생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독일식 선거 제도를 시도하더라도 주요 정당이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 ++위성정당 등을 만들어 전략적으로 우회할++ 경우, 비례성은 개선되지 않고 제도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와 정부의 책임성도 약화된다.
상충관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다수제와 비례제의 여러 세부 제도들이 다양하게 결합된 결과로 지적된다. 제도 개혁의 성과는 동일한 층위의 개별 제도 간의 결합보다는, 상호 보완성을 갖는, 상이한 수준의 제도 간 결합에서 그 가능성이 더 잘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통령제와 의회제를 절충할 때 그 장단점은 같은 층위의 정치 제도 자체가 갖는 속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각각의 권력 구조와 하위 선거 제도의 조합에 따라 절충의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의회제와 다수제의 조합이나, 대통령제와 비례제의 조합은 제도적 상호 보완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수제는 대체로 양당 체제와 친화력을 갖기 때문에 '순수' 의회제와 조합하면 입법-행정 영역은 물론 정당 체제에서도 권력 집중을 강화하여 견제가 특히 취약해질 수 있다. 비례제는 대체로 다당 체제와 친화력을 갖기 때문에 '순수' 대통령제와 조합하면 입법-행정 영역은 물론 정당 체제에서도 권력 분산을 강화하여 책임성이 특히 취약해질 수 있다. '순수' 의회제 국가들이 비례제를, '순수' 대통령제 국가들이 다수제를 채택해 온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정치 제도 설계에서 개별 제도와 그 제도가 추구하는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좋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관련 제도를 기계적으로 절충하면 단점만 취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정 제도들이 어떤 맥락에서 실질적으로 결합되고, 그 결합이 상충관계에 있는 제도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지 아니면 ㉤ ++증폭++하는지를 판단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결과에 따라 제도 결합에 적응하는 행위자들의 반응도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