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영국은 케냐를 식민지화하는 초기부터 통치 법령을 제정하고 철도를 부설하면서 부족들의 토지를 침탈하여 영국 정착민들에게 이양해 갔다. 이러한 정책은 토착민들을 낯선 보호 구역으로 몰거나 영국인들의 저임금 노동자로 밀어 넣었다. 이후 보호 구역의 인구는 과밀해졌고, 토착민들의 생활 수준은 줄곧 하락했으며, 노동 임금 또한 낮게 통제되었다. 보호 구역 밖으로 나가려면 신분증이 담긴 상자인 키판데를 목에 걸어야만 했는데 토착민들은 자괴감에서 이를 염소 목의 방울이라 불렀다. 1920년대부터는 가장 큰 부족인 키쿠유족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토지와 자유를 회복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상은 탈식민의 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 무렵 케냐에서는 영국 정착민들의 정치적·경제적 세력이 여전히 공고했기 때문에, 케냐 식민 당국은 토착민의 온건한 주장마저 무시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 케냐의 저항 운동은 식민 당국의 효과적인 파괴 공작으로 사그라지는 듯이 보였으나 그것이 시작이었다. 저항 운동은 1952년에 반식민 무장 투쟁인 마우마우 봉기로 발전한다. 키쿠유족 저항 조직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 항쟁은, 약해진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세계사적 투쟁의 경향과 궤를 같이한다. 키쿠유족 지역들과 수도 나이로비의 불만 세력은 반식민 운동으로 결속하며 무력 항쟁으로 나아갔다. 비상시국이 선포되고, 봉기는 격화되었으며, 무자비한 진압이 빈발했다. 사망자만 수만 명에 이르렀다. 영국 군경뿐 아니라 친영파 부족민까지 항쟁의 대상이었기에 마우마우 봉기는 독립 전쟁이면서 내전의 성격도 보였다. 실제로 영국 쪽 사상자 중에는 백인보다 아프리카인이 훨씬 많았다. 영국은 인근 국가의 병력까지 동원해서야 저항을 진압할 수 있었고, 1954년에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마우마우는 갑남을녀의 운동이었다. 참여자들은 무장 게릴라인 '숲속의 전사'들이 되거나 병참 지원 비전투원인 '수동적 날개'로서 힘을 보탰다. 후자에는 여성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영국은 진압을 마친 뒤에도 1960년까지 ㉠ ++비상시국을 유지++하였다. 이 시기에 동조 혐의가 있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수용소를 케냐 전역에 150개소 남짓 설치하여 15만 명 넘게 감금하였고, 이들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노역에 동원하였다. 이는 케냐 식민 당국이 영국도 가입한 1953년 유럽인권협약을 의식한 것이다. 협약 제3조는 재판 없는 구금을 금지하며, 제15조는 공공질서가 극단적으로 위협받는 비상시나 전시에만 제3조에 대한 예외를 둘 수 있다고 한다. 수감자들에게는 모욕, 폭력, 고문이 흔한 일이었고, 학살도 있었다. 1948년 유엔 고문금지협약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도 고문은 금지된다. 1949년 제네바조약상 전쟁포로라 해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까닭으로 영국이 나치 수용소를 운영한다는 비판은 받을 만했다.
1963년 말 독립한 케냐는 독립운동가인 케냐타가 국가수반이 되어 여러 부족을 차별 없이 정부에 등용하여 안정을 통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과거사에 대한 진상 조사도 착수되었는데 충분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채, 이후 들어선 권위주의 정권에서 사실상 진행이 중단되었다. 2002년 민주화 이후에야 과거사 배상 문제가 제대로 제기될 수 있었고 피해자들의 신고가 줄을 이었지만, 2007년 민주화 세력이 분열하면서 이 사안은 다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2009년 무투아 등 고령의 피해자 5명은 개인 자격으로 영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구하는 소를 영국의 법원에 제기하였다. 영국은 상호 협의 아래 임시정부를 거쳐 통치권을 이양한 만큼 과거사에 대한 책임은 현 케냐 정부에 있다는 입장을 내내 견지한다. 수많은 증거가 드러나고 국제적 비난까지 겹치자, 2013년 영국 외무장관 헤이그는 고문 생존자 5,228명에 한하여는 배상을 약속하며 유감을 표명하였다. 지금도 많은 소송이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