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현대 사회에서 미래는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며 파국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인식된다. 오피츠와 텔만은 미래에 대한 이러한 인식 틀을 '비상사태 상상'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비상사태 상상은 일어날 확률과 관계없이 일단 발생할 경우 사회 전체를 붕괴시키는 파국적 가능성의 영역을 다룬다. 동시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재난을 임박한 문제로 묘사하여 그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강제한다.
이는 미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심리적 차원을 넘어, 현재의 사회 질서를 재편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한다. 오피츠와 텔만은 지금까지 위험 담론이 불확실한 미래를 어떻게 식별하고 지식화할 것인가에만 집중했다면, 오늘날에는 사건을 시간상에서 구성하는 방식, 즉 시간성 자체를 변형시키려는 시간의 정치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만의 사회적 시간 이론은 유용한 분석 틀을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법과 경제 같은 사회 체계는 각각 고유한 시간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 관념은 두 가지 차원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 첫 번째 차원은 현재의 시점에서 예측한 미래이며, 두 번째 차원은 미래에 실제로 도래하게 될 현재를 의미한다. 그런데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도 두 시간의 차원 사이에 발생하는 불일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 현대 사회는 과거의 자료를 분석하여 미래에 일어날 확률을 계산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이 기술은 사회가 확률적으로 높은 특정 경우를 인지할 수 있도록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가능성의 존재 역시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이 확률 계산에서 비상사태 상상은 항상 다른 가능성 즉, 파국적 사건의 발생에 더 주목한다. 이와 함께 그 파국이 언제 어떻게 올지는 모르게 함으로써 현재의 불안정성을 강화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경제 체계와 법체계에서 비상사태 상상이 각각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미래 지향적 경제 체계의 시간성은 비상사태 상상과 긍정적으로 공명한다. 루만에 따르면 고전적 의미의 금전 화폐는 과거의 이력을 묻지 않으며, 오직 미래의 잠재적 사용 가능성을 다룸으로써 현재를 과거로부터 단절시킨다. 경제 체계의 이러한 미래지향성은 ㉠ ++파생상품++ 시장에서 극대화된다. 파생상품은 미래의 특정 시점을 계약으로 고정하는 동시에, 그 시점까지의 현재를 극도로 유동적인 상태로 만들어 변동성 자체를 수익 창출의 원천으로 삼는다. 경제 체계에서 재난이나 파산 같은 비상사태의 도래 가능성은 체계의 중단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새로운 투자의 기회이자 체계 작동의 동력이 된다. 경제는 파국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선취함으로써 자신의 시간성을 강화한다.
반면, 법체계의 시간성은 비상사태 상상과 격렬하게 충돌한다. 법체계는 규범에 대한 기대를 과거에 고정함으로써 사회를 안정화한다. 법체계는 '만약 X라면, Y이다'라는 조건 프로그램 형식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규범에 따라 발생한 사실을 확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다. 그러므로 법적 소통은 주로 이미 발생한 과거의 사건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또한, 적법 절차 원칙은 법적 판단을 하기 전에 밟아야 할 필수적 과정과 그에 따른 최소한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법체계는 자기 자신을 시간에 구속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비상사태 상상의 논리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법이 개입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 ++예방적 구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제도는 테러를 범할 위험이 있다고 의심되는 자를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구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근거로 현재의 처벌을 가하는 것으로, 과거로 흐르는 법체계의 시간성을 역전시킨다. 한편, 임박한 파국 앞에서 절차적 지연은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간주된다. 더 나아가 우려되는 해악의 심각성과 시간적 긴박성이 강조될수록 인간의 존엄 같은 절대적 가치조차 유예되고 미래에 달성해야 할 정책 목표가 그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식으로 이전에 자명하게 여겼던 법치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위기 담론에 잠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