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조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표준 음률을 정하고 아악(雅樂)을 제정하는 사업을 맡았던 박연이 황종관 제작의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제시했던 해결 방안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박연이 아뢰기를,
“기장[黍]을 쌓는 법은 비록 전적(典籍)에 기재되어 있지마는 참된 기장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중략) 신이 원하옵건대, 남방의 여러 고을에서 기른 기장을 모두 가져와 세 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쌓아 황종관을 만들어, 그중에 중국의 음과 서로 합하는 것이 있으면 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을 만들고, 오성(五聲)의 조화를 얻으면, 이어서 도(度)·량(量)·형(衡)도 따라서 살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중국 역대의 음률 제정이 기장으로 말미암아 일정하지 않았고, 성음의 높낮이도 시대에 따라 달랐으니, 지금 중국의 음률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의 기장이 참됨을 얻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음률과 도·량·형의 제정은 곧 천자의 일이고 제후의 나라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만약 지금 남방의 ‘검은 기장[秬黍]’이 끝내 중국의 황종(黃鍾)\과 합하지 않는다면 일단은 형편에 따라 다른 종류의 기장을 임시로 사용해 쌓아 율관을 만들어 중국의 황종에 맞추고, 그런 연후에 법도에 따라 가감해 성률을 바로잡으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12년 9월 11일 조에는 세종이 음률 제정의 고제(古制)를 탐구하던 중에 황종관 제작 사업의 방향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아악은 본디 우리의 소리[聲]가 아니고 실은 중국의 소리[音]이다.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으므로 제사 때 연주함이 마땅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전에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어서는 아악을 연주하니 어찌 그러한가? 하물며 아악은 중국에서도 시대에 따라 만든 것이 다르고, 황종의 소리 또한 높고 낮음이 있다. 이로 보아 아악의 제도는 중국에서도 일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조회나 하례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려고 하나, 합당한 제도를 정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황종관으로는 후기(候氣)\\함도 여의치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가 동쪽에 치우쳐 있어 춥고 더운 풍기(風氣)가 중국과 아주 다른데, 어찌 우리나라의 대나무로 황종관을 만들겠는가. 황종은 반드시 중국의 관을 사용해야 될 것이다.
(중략) 박연이 만든 황종관은 어느 제도에 근거해 바로잡은 것인가? (중략) 지금 우리나라의 기장을 가지고 황종관을 정하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이다. (중략) 봉상시에서 악을 익히는 자들이 관습도감의 사람들만 못할 것이니, 모름지기 관습도감의 사람들로 하여금 익숙하게 익히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연·정양은 모두가 신진 인사들이라 오로지 그들에게만 의뢰할 수 없을 것이니, 경들은 유의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12년 12월 1일 조에는 「아악보(雅樂譜)」가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15년 1월 1일 조에는 아악의 제정 과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관의 기록이 있다.]
을사년(세종 7년) 가을에 해주에서 검은 기장이 나고 병오년 봄에 남양에서 경석(磬石)이 산출되니, 임금께서 개연히 옛것을 개혁해 새로이 고치려는 뜻을 갖고 박연에게 편경(編磬)을 만들라 명하였다. 다만 우리나라는 본래 화음이 맞는 악기가 없어서, 박연이 해주산 검은 기장을 취하여 쌓아 크기를 맞추어 옛 설에 의거해 황종관 한 개를 제작해 불어 보니 중국의 편종과 편경이 내는 황종음보다 약간 높았다. (중략) 우리나라는 동쪽에 치우쳐 있어 풍토 및 기후가 중국과 매우 달라 후기로 음률을 찾으려 해도 응당 증험하지 못할 것을 헤아려, 해주산 검은 기장의 모양으로 밀랍을 녹여 그것보다 약간 큰 낱알을 만들어 쌓아 황종관을 만드니, 그 형태가 우리나라의 작은 ‘붉은 기장[丹黍]’과 똑같았다. 곧 1알을 1푼[分]으로, 10알을 쌓아서 1치[寸]로 하는 법식으로 해서 9치를 황종관의 길이로 정하니 90푼이다. 여기에 1치를 더해서 황종척(黃鍾尺)의 길이로 정했다. (중략) 밀랍으로 만든 기장 1,200개를 관에 넣으니 진실로 남고 모자람이 없었고, 불어 보니 중국의 편종과 편경이 내는 황종음과 서로 맞았다.
(중략) 지신사 정흠지 등이 박연에게 묻기를 “형제(形制)와 성음의 법을 어디에서 취했는가?” 하니, 박연이 말하기를 “형제는 중국에서 하사해 준 편경에 의하였고, 성음은 신이 직접 만든 12율관으로 맞추어 이루었습니다.” 하였다. 여러 대언(代言)들이 박연에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중국의 음을 버리고 직접 율관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모두 터무니없고 망령되다 여기었다.
(중략) 임금이 박연에게 명하기를, “내가 조회의 아악을 창제하고자 하는데 입법과 창제는 예로부터 하기가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막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에서 모두 하고자 하여도 시운이 불리한 때도 있다.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졌고, 나라에 일이 없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 황종 : 아악의 12음률 가운데 첫 번째 음.
\\ 후기 : 절기에 따라 달라지는 천지의 기(氣)를 황종관으로 측정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