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등장인물들은 조당전의 집에서 〈영월행 일기〉에 따라 역할놀이를 한다. 이어서 〈세조실록〉과 〈해안지록〉을 함께 놓고 원탁 독회를 하며 관련 내용을 확인한다. 서재 뒤편에는 다른 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있다. 역할놀이를 위해 소도구가 사용된다.
(조당전, 미닫이 앞에 와서 당나귀를 멈춘다.)
조당전:기와집 문 앞이야.
김시향:조용하군요, 여전히…….
조당전:음…….
김시향:우리가 왔다고 말해요.
조당전:(당나귀에서 내려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한다.) 문안드리오! 지난 여름 다녀갔던 봇짐장수, 가을에 다시 와서 문안드리오!
(미닫이문, 양쪽으로 벌어지며 열린다. 그 뒤쪽에 웃는 표정의 소년 형상이 보인다. 소년 형상 앞에는 수많은 인형들이 나오는데, 염문지와 부천필과 이동기가 기다란 대나무에 줄을 매단 그 인형들을 움직인다. 염문지가 소년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한다.)
소년 형상:어서 오라, 그대여! 나는 그대 덕분으로 만면에 가득 웃음을 짓는도다. 보아라, 그대여! 그대가 나에게 주었던 가위로 옷감을 자르고, 바늘과 실로 사람 형상으로 꿰매었더니 비록 안에는 톱밥을 채워 넣고 사지는 줄로 매달았으나 능히 살아있는 듯 움직이도다. 성삼문아, 박팽년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야, 나를 위해 죽은 사육신이여! 내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부천필과 이동기, 여러 인형들을 움직여서 웃는 얼굴 앞으로 옮겨 세운다.)
소년 형상:김시습, 성담수, 조여, 이맹전, 원호, 남효원, 나를 위해 자취 감춘 생육신이여! 그대들도 오늘은 내 앞으로 나오너라!
(부천필과 이동기, 또 다른 인형들을 웃는 얼굴 앞에 옮겨 놓는다.)
소년 형상:어서 오너라, 나를 핍박한 한명회도 반가웁고, 나를 동정한 신숙주도 반가웁구나! 오랫동안 쓸쓸한 공백, 텅 비었던 시야가 문무백관으로 가득 찼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왕후여, 그리운 왕후여, 내 옆에 와서 좌정하십시오! 만조백관들이 엎드려 절을 하니, 흔쾌한 웃음 짓고 이 절을 받으십시다!
(염문지, 왕후의 의복으로 성장을 한 조그만 인형을 소년 형상 옆에 앉힌다. 부천필과 이동기는 수많은 신하 인형들을 움직여 절을 드린다.)
소년 형상:보아라, 그대여! 내 몸은 비록 왕관 빼앗기고 곤룡포 벗김 당하였으나, 내 마음은 헝겊으로 만든 만조백관들을 바라보며 흡족하도다! 들어라, 봇짐장수여!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를 보낸 자들에게 내 말 전하여라! 내 마음이 진정 왕과 같거늘, 어찌 구차한 왕관을 쓰기 바라고, 구태여 곤룡포를 입기 바라겠느뇨? 나는 나를 왕좌에 복위시키려는 그 어떤 짓도 관심이 없고 그 어떤 사람과도 관련이 없으니, 그대는 돌아가 이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전할지어다!
(벌어졌던 미닫이문이 닫힌다. 조당전은 당나귀와 함께 돌아선다. 그러나 김시향은 조금 전 봤던 광경에 사로잡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서 있다.)
조당전:뭘 해, 가질 않고……?
김시향:아…….
조당전:우린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해 주자구.
김시향:네…… 가요…….
(조당전과 김시향, 미닫이문 앞을 떠난다. 그러자 염문지, 부천필, 이동기가 그 문을 열고 서재로 나온다.)
이동기:쉽지 않더군. 인형들을 살아있는 듯 움직인다는 게…….
부천필:어때? 자네 부탁이어서 잘 해 보려고 애는 많이 썼는데?
조당전:아주 잘 했어.
염문지:정말인가?
조당전:나중엔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
친구들:실감나게 보였다니 다행이군!
조당전:(김시향에게 친구들을 소개하며) 고서적 연구 동우회 회원들이죠. 염문지 씨, 부천필 씨, 이동기 씨입니다.
친구들:안녕하십니까!
김시향:안녕하세요.
조당전:(친구들에게 김시향을 소개한다.) 이 분은 〈영월행 일기〉를 나에게 파셨었지.
부천필:언젠가는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이 친구하고 영월에 갔다 오곤 하신다는 건 알고 있었지요.
김시향:저도 선생님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염문지:그럼 우리가 〈영월행 일기〉를 연구한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김시향:네.
염문지:오늘은 우리와 자리를 함께하십시다. (구석에 놓인 원탁을 가리키며) 저기, 원탁 위에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어요. 영월에 다녀온 뒤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저 자료들을 살펴보면 알게 됩니다.
(고서적 동우회원들, 원탁과 의자들을 서재 한가운데 옮겨 놓는다. 염문지가 먼저 원탁에 앉고, 부천필과 이동기가 좌우로 나눠 앉는다. 조당전과 김시향은 부천필 옆 의자에 앉는다.)
염문지:영월에서 돌아온 날짜가 언제였지?
조당전:(원탁 위에 놓여 있는 〈영월행 일기〉를 집어들고 날짜를 확인한다.) 음…… 우린 구월 그믐날 돌아왔어.
염문지:(〈세조실록〉을 펼쳐서 페이지를 넘기며) 어전회의는 그 이후에 열렸겠군.
김시향:무슨 책이 그렇게 두툼해요?
염문지:〈세조실록〉이죠. 모두 사십오 권이나 되는 방대한 규모입니다.
조당전:이 일기에 씌어 있기를 어전회의는 시월 열여드레 날 열렸다는군.
염문지:그렇게 늦게……?
조당전:회의를 늦추며 뭔가 대관들끼리 의견 절충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야.
이동기:나 같으면 절대로 절충은 안 해!
부천필:저 고집 좀 봐!
염문지:아, 여기 찾았어. “세조 삼 년 시월 십팔 일, 노산군의 기쁜 표정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동기:(〈해안지록〉을 펼쳐서 부천필에게 밀어 주며) 〈해안지록〉의 마지막 장이야. 자네가 먼저 읽게.
부천필:(〈해안지록〉을 이동기에게 밀어 준다.) 아냐, 자네가 먼저 읽어.
이동기:“소신 한명회, 전하께 아뢰옵니다.”
염문지:〈세조실록〉에는 그날 임금은 늦은 보고에 몹시 기분이 상했다고 적혀 있군.
이동기:“영월에 다녀온 자들이 말하기를 노산군의 얼굴은 만면에 웃음 지은, 기쁨의 표정이라 하나이다. 이는 날이 갈수록 그가 오만불손해지고 있음이니, 전하께선 더 이상 지체 마옵시고 그를 처형하소서!”
(이동기, 〈해안지록〉을 부천필에게 밀어 준다.)
부천필:“전하…… 영월에 다녀온 자들이 말하기를, 노산군은 왕권에는 관심이 없고, 복위에도 관련이 없다 하였나이다. 노산군의 기쁨은 무욕에서 우러나오는 것, 그의 웃는 얼굴은 욕망을 버린 증거이온데, 어찌 죄가 되오리까? 전하께선 부디 그를 살려 주옵소서.”
김시향:저렇게 주장하는 분은 누구시죠?
조당전:신숙주입니다.
이동기:(부천필에게) 그 책 이리 줘. 내 차례야.
부천필:(이동기 앞으로 책을 밀어 주며) 좀 부드럽게 읽어.
이동기:부드럽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염문지:그래, 자네 성질대로 해.
이동기:“전하,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지 아니하며, 땅에는 두 명의 제왕이 있지 않나이다. 그러함에도 노산군은 방자하게 자신이 왕의 마음을 가졌다 하였으니 이는 전하와 동격이라는 주장인바 결코 용납해선 안 될 것이옵니다.”
염문지:여기 실록에는…… 세조가 노기충천하여 그 말이 사실인지를 재차 물었어.
이동기:“의심 마옵소서, 전하. 소신과 신 대감이 함께 들었나이다.”
부천필:(이동기 앞에 놓인 〈해안지록〉을 황급하게 가져가서 읽는다.) “전하, 통촉하옵소서. 한낱 필부도 마음이 흔쾌할 때는 제왕을 부러워 않는 법, 노산군의 말을 곡해하지 마옵소서.”
염문지:(〈해안지록〉을 자신의 앞으로 당겨 놓고 세조의 발언 대목을 찾아 읽는다.) “경들은 들으라! 노산군의 무표정을 견뎠던 내가, 슬픈 표정도 견뎌냈던 내가, ㉠++기쁜 표정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도다++! 만약 노산군의 기쁜 표정을 그대로 두면 온갖 시정잡배마저 제왕과 다름없다 뽐낼 터인즉, 대체 짐이 무엇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겠느냐?”
이동기:“소신의 주장이 처음부터 그 뜻이었나이다. 전하, 속히 처단하소서.”
염문지:“노산군을 죽여라!”
김시향:(놀란 표정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죽여요?
염문지:“당장 영월로 사약을 보내라. 하늘에는 오직 한 태양만이 빛을 내고, 땅에는 오직 짐만이 웃는 얼굴임을 보여 줘라!”
— 이강백, 「영월행 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