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권위의 역설’은 통상 인간의 도덕적 삶에 필수적이라 여겨지는 두 요소인 ‘권위’와 ‘합리성’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들이라는 언명을 말한다. 합리적인 행위란 그 행위 자체의 가치에 대한 판단의 결과를 행위의 근거로 삼는 것인 반면, 권위에 따른 행위는 행위 자체의 가치와 무관하게 ‘단지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그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두 개념이 전제하는 실천적 추론의 구조, 즉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떤 이유에서 결정할 것인지에 관한 사고의 구조가 상호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결국 합리성 개념과 양립할 수 없는 권위 개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합리적 인간이라면 권위를 자기 행위의 근거로 삼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권위를 꼭 필요로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권위가 옳은 행위를 명하는 것이라면 굳이 옳은 행위를 하기 위한 근거로서 명령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른 행위를 명하는 것이라면 명령에 따르는 행위를 합당하게 근거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라즈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권위의 역설이 담고 있는 논리는, 권위 개념이 전제하는 실천적 추론의 구조(A)가 합리성 개념이 전제하는 실천적 추론의 구조(B)와는 결코 화해될 수 없기 때문에 권위에 따르면서도 합리적인 것이란 마치 ‘둥근 사각형’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성립하려면 우선 실천적 추론의 구조가 A이면서도 그 행위 수행 과정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사례(π)가 없어야 한다. 만일 π가 제시된다면 “행위 자체의 가치에 대한 판단 결과를 행위의 근거로 삼는다.”라는 말로는 B를 적절히 기술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이에 기초한 ‘권위의 역설’ 자체도 흔들리게 된다. π를 포괄하면서도 역설이 생기지 않도록 B를 적절히 재구성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우선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앤은 온종일 비정상적으로 극심한 업무에 시달린 후 퇴근하였다. 그날 밤 그녀의 친구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평소 알아보고 있던 ‘투자할 건수’를 알려주었다. 이 투자 제안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날 자정까지 투자 여부를 확답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제안을 검토하지 않고, 투자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앤은 투자 거절이라는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고 행위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한 이유를 들어 행위하고 있음에도 매우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이에 대해 라즈는 앤의 행위도 실은 적절한 이유나 근거에 따라 수행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때의 근거는 ‘행위 자체의 가치에 대한 판단 결과’를 도출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보통의 행위 근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행위를 지지하는 근거와 반대하는 다른 근거 중 어느 근거에 따를 것인지 즉 그 행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행위 근거들의 논리적 강도나 비중의 상대적 크기를 저울질함으로써 결정되지만, 앤의 행위는 그러한 저울 자체를 치워 버리게 하는 독특한 행위 근거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보통의 행위 근거들보다 한 단계 위에 존재하면서 그러한 행위 근거들이 행위 여부를 결정하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위의 행위 근거라 할 수 있는데, 라즈는 이를 ‘배제적 근거’라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배제적 근거에 따른 행위 수행’이야말로 바로 권위에 따른 행위에서의 실천적 추론의 구조(A)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권위는 그 개념상 명령된 행위가 옳은 것인지에 대한 수명자(受命者)의 판단에 행위 수행 여부의 결정을 맡기지 않으며, 수명자는 행위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 행위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한 이유에서 행위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명령된 행위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한 판단 결과를 도출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행위 근거들은 권위에 따른 행위에서의 실천적 추론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도록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배제적 근거에 따른 행위 수행 사례가 호소력을 갖는 한, 더 이상 권위 개념이 전제하는 실천적 추론의 구조를 들어 권위와 합리성이 개념적으로 양립 불가능함을 주장할 수는 없게 된다. 권위에 따른 행위가 합리적일 수 있는 개념적 여지가 바로 배제적 근거의 존재에서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