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화학과 물리학은 어떤 관계에 있고, 양자의 관계는 두 학문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두 학문은 오랫동안 따로따로 발달했지만 100년 전쯤부터 급속히 서로 가까워졌다. 첫 접촉 지점은 분광 스펙트럼이었다. 스펙트럼 분석법은 1870년대부터 화학자들에게 유용한 도구였다. 미량의 시료만 있어도 분광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색 띠들의 패턴이 거기 어떤 물질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어김없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런 색 띠들이 나타나고 그 패턴이 원소마다 고유한지 화학자들은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원자의 구조와 씨름하던 물리학자들이 이 선들이 원자 안의 전자들이 방출하는 전자기파에 의한 것임을 알아냈고, 원소마다 고유한 전자 배치가 스펙트럼의 고유한 패턴의 근거라는 설명을 제공해 주었다. 1913년 물리학자 보어는 원자 이론을 토대로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을 거의 정확히 설명해 냈다. 그의 이론은 수소 이외에 다른 원소의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눈감아 줄 수 없는 오차를 낳았지만, 그런 이유로 인해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원소들의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있는 세련된 이론의 형성을 촉발하여 현대 물리학의 중심 이론인 양자역학의 발달에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한 분야가 필요로 하는 이론이나 방법론을 다른 분야가 제공할 때 두 분야 간에는 일종의 비대칭적 의존 관계가 형성되는데, 화학과 물리학 사이에는 광범위하게 이런 의존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이들이 화학은 물리학으로 환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설명력을 후자로 흡수 통합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주장이 정당화되려면 화학적 문제가 요구하는 설명과 예측을 물리학이 빠짐없이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근 화학에는 양자화학이라는 분야가 발달해 화학적 현상을 현대 물리학의 핵심 이론인 양자역학의 기반으로 환원시켜 다루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양자화학은 양자역학의 도구인 슈뢰딩거 방정식을 써서 분자 내 전자들의 정밀한 배치 구조를 계산한다. 양자화학에서 ‘순이론적 방법’은 주어진 계(system)에 대한 슈뢰딩거 방정식을 세우고 그 해를 구한 뒤에 그것을 화학적 문제에 적용하려 한다. 예컨대 수소 원자의 경우 슈뢰딩거 방정식 Ĥψ = Eψ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다른 경우에도 그 계의 퍼텐셜 에너지를 고려하여 슈뢰딩거 방정식을 세우고 그 방정식을 풀어 파동함수 ψ를 구하면 그것을 가지고 과학자는 계의 상태에 대한 여러 가지 계산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어 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원자핵과 전자 한 개로 구성된 수소 원자의 경우뿐이다. 헬륨 원자나 수소 분자까지 포함해서 화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사실상 모든 경우에 슈뢰딩거 방정식의 정확한 해는 구할 수 없다. 이런 경우 해의 근사적 형태를 구하지만, 아주 비슷한 것이라도 ‘진짜 그것’은 아니다. 환원의 장애물은 이뿐만이 아니다. 수소 원자의 경우라도 외부 자기장의 영향이 있으면 정확한 해를 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양자화학에서는 근사와 보정의 기법을 적극 활용하는 ‘보정된 방법’이 많이 쓰인다. 이러한 근사의 기법은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법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정된 방법’에서는 실험에서 옳다고 판명된 해를 문제 상황의 이론적 접근에 활용한다. 파동함수 ψ가 취할 수 있는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를 택할 때나 근사의 세부 방식을 정할 때, 화학자들은 이미 확보된 경험적 자료의 관점에서 가장 그럴 듯한 것을 택한다. 또 그러한 시도 끝에 얻은 화학 실험의 결과는 다시 이론 쪽에 투입되어 처음에 놓았던 이론적 가정을 수정하는 데 쓰인다. 화학자들은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출발점에 놓을 이론을 수정해간다. 이는 환원하는 이론이 환원될 대상인 화학의 방식으로 산출된 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뜻하고, 이로써 ㉠++양자화학에서 의도된 환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그러나 분광 스펙트럼과 원자 이론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현재의 환원 가능성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환원을 완성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환원의 토대가 되는 이론과 그것으로부터 설명을 제공받는 이론이 모두 발전의 계기를 얻는다. 분야 간의 환원 가능성을 둘러싼 토론은 현재 상태에서 환원이 성공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두 분야의 발전 방향을 지시한다는 역동성의 관점에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