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철학적 글쓰기 방식에 대한 규정은 철학의 학문적 성격에 대한 규정과 직결된다. 현상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통해 그 타당성이 판정되는 경험과학과는 달리, 철학은 현상 너머의 메타 원리를 알고자 한다. 동시에 그것이 학문인 한 철학은 결코 정당화의 책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주장의 선언이 아닌 엄밀한 논증의 형태로 존립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텍스트에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지는, 그 내용 기술이 이 조건을 충족하는지에 따라 결정될 수 있으므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양식으로 작성되는가 하는 것은 단순한 사적 취향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양식이 철학의 학적 건강도를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된 쉽지 않은 사안이다.
이 점에서 회슬레의 철학 장르론은 주목을 끈다. 그의 이론은 ‘객관성’, ‘주관성’, ‘간주관성’이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범주의 이러한 삼분화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이 세 범주는 각각 존재, 인식, 의사소통이라는 영역을 포섭하는 것으로서, 철학적 주제의 전 영역을 가리킨다. 즉 철학적 진술은 어떤 개성을 지닌 저자가 어떤 입장에서 어떤 주제에 집중하건, 결국 객관적 대상에 관한 진술, 그 대상을 마주하는 주체에 관한 진술, 또는 주체들끼리의 관계에 관한 진술 중 적어도 하나에 속한다. 나아가 이 범주들은 철학적 글쓰기 양식의 유형학적 분류에 유용하다. 즉 철학적 진술은 문제의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다루는 방식, 주제에 대한 자신의 내면적 사유의 흐름을 기술하는 방식, 또는 문제를 둘러싼 여러 주장들을 직접 대결시켜 보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는데, 이 세 유형의 철학 텍스트 양식을 그는 각각 ⓐ '++객관성의 장르++', ⓑ '++주관성의 장르++', ⓒ '++간주관성의 장르++'라고 부른다. 물론 세 범주에 포섭되는 세 주제 영역과 세 유형의 텍스트 양식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일대일 대응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즉 하나의 범주에 속하는 주제는 다른 범주에 속하는 글쓰기 양식으로도 기술될 수 있다.
먼저 객관성의 장르에서는 주로 주제 그 자체가 주어로 등장하며, 문체상 저자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경우에도 저자 개인이 텍스트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가령 헤겔은 〈논리학〉에서 결코 그 자신에 관해 말하지 않거니와, 이 저작은 철저히 개념들의 논리적 규정 및 그것들 간의 이행 관계 등에 대한 기술로만 구성된다. 이는 진술의 진행이 저자의 자의적 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제 자체의 논리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반면 주관성의 장르에서는 저자 개인 또는 주제와 관련된 그의 사유의 전개 과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가령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대부분의 문장은 1인칭 단수의 동사나 대명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텍스트를 통해 독자는 저자의 사유 과정을 생생하게 따라가며 확인할 수 있다. 끝으로 플라톤의 〈국가〉와 같은, 간주관성의 장르의 전형인 대화편에서는 저자 개인뿐 아니라 타인 또한 명시적 발화 주체로 등장하며, 심지어 저자 자신이 타인의 형태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로써 주장들은 좀 더 생생하게 전달될 뿐 아니라 그것들 간의 대립 및 친화 관계도 잘 드러난다.
회슬레는 특히 대화편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보이는데, 이는 간주관성의 범주에 각별한 지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즉 철학적 주제는 그 자체로는 드러날 수 없으며 발화자인 저자에 의해 비로소 주제로서 표면화된다. 그리고 저자의 발화 행위는 이미 그것을 읽고 이해하고 물음 또는 반론을 던지는 독자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한다. 다시 말해 객관성은 주관성을 요청하고, 주관성은 또 다른 주관성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의미를 얻기 때문에, 결국 앞의 두 범주는 간주관성으로 수렴된다. 이러한 원론적인 측면을 논외로 하더라도 대화편은 철학의 본원적 난제, 즉 메타 차원의 문제에 대한 이론을 정당화된 논변으로 구성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사정을 해소하려는 노력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예상되는 반론들을 견뎌야 하는데, 대화편에서는 저자의 견해를 대변하는 인물뿐 아니라 그에 맞선 반론의 주체 등, 그 나름의 논리로 무장한 다양한 관점의 인물들이 동격의 토론 참여자로 등장하며, 저자는 그 반론들과 자신의 재반론을 지속적으로 경합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요즘 철학에서 대화편이 저술되는 경우는 드물다. 간주관성의 옹호자 회슬레에게 이는 유감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철학적 텍스트의 생명을 좌우하는 논증의 엄밀성은 ‘주제 그 자체’를 중심으로 개진되는 객관성의 장르에서 잘 성취될 수 있다는 일반적인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논증의 폭과 반론에 대한 면역성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는 오히려 대화편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르의 저술이 거의 없다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회슬레의 유감은 이해할 만하다.